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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토론] 히틀러는 어떻게 독재가가 되었나?
👤 파랄랄 8

"천재의 화실과 독재자의 부랑자 수용소… 빈(Vienna)의 엇갈린 두 청년이 바꾼 인류사"


에곤 쉴레의 천재성과 히틀러의 좌절된 야망, 그리고 유대인 혐오의 시발점


예술가의 꿈이 좌절된 청년, 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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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뮌휀 시절의 젊은 아돌프 히틀러


1907년의 오스트리아 빈(Vienna)은 유럽 예술과 문화의 심장부였지만, 동시에 다민족 간의 갈등과 사회적 불안이 끓어오르는 용광로였다. 이 시기,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미래를 꿈꾸던 두 명의 청년이 있었다. 1890년생의 에곤 쉴레와 1889년생의 아돌프 히틀러. 고작 한 살 차이였던 두 청년은 모두 빈 미술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렸으나, 결과는 잔인할 정도로 극과 극이었다.


천재의 합격과 낙방자의 열등감

16세의 나이로 최연소 합격증을 거머쥔 에곤 쉴레는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의 총애를 받으며 표현주의의 거장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반면, 두 차례나 낙방의 고배를 마신 히틀러는 부랑자 수용소를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히틀러는 그림 엽서를 그려 겨우 생계를 이어가며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다.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쉴레를 비롯한 '성공한 예술가 집단'을 향해 히틀러가 가졌을 열등감과 시기심은 사회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번졌다. 그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대신 "썩은 사회가 천재를 몰라본다"며 분노의 화살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했다.


         극과 극으로 엇갈린 두 사람의 회화 스타일 비교

 1) 에곤 쉴레의 표현주의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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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곤 쉴레, <강가의 집들>(1915)

인간의 내면적 불안과 뒤틀린 욕망을 거칠고 왜곡된 선과 독창적인 색채로 파격적으로 표현했다.


2) 아돌프 히틀러의 고전주의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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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돌프 히틀러의 풍경화

화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예술적 영혼이 배제된 채, 건축물과 도시 풍경을 자 대고 그리듯 정교하고 기계적으로 모사하는 데 치중했다.


소수 유대인의 부유함과 대중의 시기심

당시 히틀러가 마주한 현실은 그의 왜곡된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내에서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약 1%에 불과한 소수였지만, 의사·변호사·교수 등 전문직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은행, 백화점, 언론 등 주요 경제적 핵심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부랑자 생활을 하며 대도시 유대인들이 누리는 경제적·문화적 풍요를 목도했다. 게르만족보다 소수이면서도 사회적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컸던 유대인들의 모습은, 밑바닥 생활을 하던 히틀러에게 극심한 박탈감과 불만을 심어주었다. 이는 훗날 그가 "독일인이 굶주리는 것은 유대인이 부를 독점했기 때문"이라는 대중주의적 반유대주의에 깊이 빠져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패전의 트라우마와 음모론의 완성

개인적 열등감과 유대인에 대한 불만이 '광기'로 진화한 시발점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이었다. 전선에서 하사관으로 참전했던 히틀러는 1918년 독일의 무조건 항복 소식에 거대한 정신적 공황을 겪었다. 이때 우익 군부 사이에서 퍼진 '배후중상설(독일군은 전선에서 지지 않았으나, 후방의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이 조국의 등 뒤에 칼을 꽂았다는 음모론)'은 히틀러의 가치관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실패, 비참했던 부랑자 시절의 기억, 그리고 조국의 패전이라는 모든 비극의 배후에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유대인'이 있다는 괴물 같은 확신을 정립했다.


미술사적 비극, 그리고 인류사적 비극

훗날 권력을 잡은 독재자 히틀러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표현주의 미술, 특히 쉴레의 화풍을 '정신적 타락'이자 '퇴폐 미술(Degenerate Art)'로 규정하며 철저히 탄압했다.

28세의 나이에 스페인 독감으로 요절했으나 미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에곤 쉴레, 그리고 미술의 좌절과 사회적 시기심을 인류 최악의 학살로 배설해 낸 아돌프 히틀러. 빈의 미술 아카데미가 내린 엇갈린 선택과 한 청년의 뒤틀린 열등감은 결국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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